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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간다

by 올곧이 2008. 11. 27.
기사입력 2008-11-27 02:57 |최종수정2008-11-27 08:27 기사원문보기

경기침체로 벼랑 끝에 내몰려 배 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25일 오후 부산 기장군 대변항에 입항한 멸치잡이 어선에서 일꾼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부산=이성덕기자 sdlee@hk.co.kr
"차마 집에 등록금 말 못 꺼내…" "막상 회사 나오니 갈 곳 없어…"
대학생·회사원 등 고깃배 타는 사람 크게 늘어
"힘들지만 석달 고생하면 1000만원까지 손에"

대학 1학년인 김모(22)씨는 지난 7월 말 꽃게잡이 배에 올랐다. 6월에 제대하고 가을학기 복학도 생각했지만, 생활비 대기도 빠듯한 버스기사 아버지에게 차마 등록금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김씨는 선주가 잡아준 인천의 한 여인숙에 묵으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배를 탔다. 식사 준비도 맡아 꽃게로 찌개를 끓이고, 그물에 걸린 생선으로 회도 쳤다. 한 푼이라도 덜 쓰려 오후 7시 일이 끝나면 여인숙으로 직행했고, 4개월 여 쉬는 날 하루 없이 일했다. "너무 힘 들어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매일 결심했지만, 그래도 곧 900만원이 넘는 목돈을 쥐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합니다."

올 초까지만 해도 중소 반도체 회사 임원이었던 엄모(49)씨. 경기침체로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직장을 나왔다. 아파트 대출이자 갚을 길도, 중학생 두 아들 뒷바라지 할 길도 막막했지만, 쉰 살이 다 된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엄씨는 결국 9월부터 안면도에서 광어잡이 배를 탔다. 어획량과 상관없이 월 200만원을 받기로 했다. 월급은 계약기간이 끝난 뒤 후불로 받지만, 엄씨는 이자를 갚기 위해 매달 50만원씩 가불을 받고 있다.

불황이 본격화하면서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서해 등에서 3~5개월 정도 고기잡이 배를 타면, 1,000만원까지 벌 수 있기 때문이다. 40대 실직 가장도 있고, 장사가 안돼 폐업 한 자영업자도 있다. 다들 불황의 직격탄을 맞아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다 취업준비 자금을 마련하려는 30대, 등록금을 벌려는 대학생도 배를 타기 위해 몰려든다. 경기침체로 수산물 매상 역시 줄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국내 선원은 인력난이다.

국내선원 모집업체인 '어장일꾼' 정승범 소장은 "배 타는 것은 마지막까지 갔다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IMF 외환위기 때도 단순노무자나 수배자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하지만 요즘은 대학생이나 회사원 등 화이트칼라 출신의 문의가 많아 놀랐다"고 말했다. 조개, 미역을 따거나 배에서 밥을 하겠다는 여성들의 문의 전화도 최근 10여 통이나 받았다고 한다.

올 8월 이후 이 회사를 통해 배를 탄 사람은 85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80명)보다 크게 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 회사원이나 자영업자 출신은 전무 했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일반 직장인과 자영업자 출신이 10명이 넘고 대학생도 7명이나 된다.

직장을 그만 두고 노무사시험 공부를 시작한 김모(39)씨는 7월부터 새만금에서 전어잡이 배를 타기 시작했다. 1년 정도 마음 편히 공부할 자금을 벌기 위해서다. 숙소는 컨테이너 박스. 그는 "숙식이 해결되고 쓰는 데가 없기 때문에 석 달이면 1,000만원 정도 벌 수 있다"며 "이 돈으로 올해 말부터 시험 준비에 몰두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래도 희망이 있어 나은 편이다. 박모(42)씨는 구리에서 세차장을 하다 직원들 월급은 고사하고 임대료도 내지 못해 문을 닫았다. 중ㆍ고교에 다니는 두 자녀의 공부만큼은 계속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꽃게잡이 배에 올랐다. 8년 동안 택배 일을 했다는 권모(32)씨는 집 장만 대출금의 월 이자 40만원을 감당할 수 없어 배를 탔다. 월 수입 180만원에서 사납금과 유지비를 떼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은, 네 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빠듯한 90만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 소장은 "내년 3월 성수기가 되면 경제적으로 타격 입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몰려들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