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애가 이 정도는 돼야 ...
내게는 이 정도의 부부애를 칭송할 만한 어구를 찾기가 너무 부족한 머리다.
그래서 그냥 햐~ 참으로....밖에 어떤 단어도 구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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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
"유례 없는 일"
입력
365일 하루도 안 거르고 하루 5시간씩 시묘살이 부인
사람들은 고
13일은 박 회장 타계 1주년 되는 날. 장 여사는 남편이 묻혀 있는 서울 동작동
-애초부터 시묘살이를 계획했는지.
“100일 탈상이 끝났는데도 하루에 30~40명이 묘소를 방문했어요. 아버지에게 인사하러 왔는데 아무도 맞아주지 않으면 어떡하겠습니까. 방문객에게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해야겠다고 곁을 지켰던 것이 벌써 1년이 됐네요.”
-1년간 심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 지금도 집에서 어쩌다 생일 때 받은 선물 같은, 추억이 담긴 소지품을 발견하면 충격 받아요. ‘내가 존재하는 게 가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집에서 나 혼자 있을 때면 방문을 잠그고 웁니다.”
장 여사는 “소지품 하나를 봐도 추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 메인 화면으로 등록해 놓은 명예회장의 사진을 슬쩍 보여줬다. 그는 “내겐 세상에서 둘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버지랑 두말없이 결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남편
2000년에는 “지구상에서 내 명의로 된 부동산은 다 없애라”는 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36년간 살았던 북아현동 집을 팔아야 했고, 박 회장은 집 판 돈 14억5000만원 중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해버렸다. 부부는 이후 전세살이를 하다가 둘째 딸 소유 한남동 맨션에서 살았다. 2010년, 박 회장은 아내에게 미안했던지 이렇게 말했다고 장 여사가 전했다. “여보, 내가 평생 살다가 남의 집에서 죽는 거 아냐.” 장 여사는 오히려 남편의 이 말 한마디가 늘 마음에 걸렸다. 보다 못한 장남이 지금 장 여사가 기거하고 있는 서울 청운동 낡은 단독주택을 샀다. 하지만 박 회장은 그 집을 자기 명의로 하는 것에 끝끝내 반대했다. “우리에게 10년 세 주는 걸로 해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청운동 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지병인 폐부종 증세가 악화돼 생을 마감했다.
박 회장은 낮잠도 소파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잘 정도로 엄격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 늘 아내부터 배려하는 남편이었다. 장 여사는 “아버지는 내겐 둘도 없이 자상한, 신사 남편이었다”고 회상했다. 장 여사는 “ 늘 ‘명예도 직위도 없이 나 하나 보고 시집온 아내를 어디 이길 데가 없어서 이겨야 하나. 내가 양보한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출장을 갈 때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꼬박꼬박 엽서를 보냈다.
박 회장은 포철 내 사원주택 단지를 꾸미는 데도 열심이었다. 임직원들에게 최고 수준의 주택·교육 단지를 제공하겠다는 신념에서다. 그래서 얻은 또 하나의 별명이 ‘떴다’다. 그가 관사에서 회사로 이동할 때면 직원들이 ‘떴다’ 신호를 주고받으며 한바탕 난리를 쳤다. 보도블록 하나가 튀어나와 있어도 호통이 나오는 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박 회장은 포항·광양에 27개의 학교를 만들었다. 한국 기업 최초로 임직원 자녀를 대상으로 전액 대학 장학금 제도도 만들었다. 장 여사는 이처럼 ‘오로지 포철’만 생각하던 남편과 함께 포스코의 변천사를 지켜봤다. 그래서 걱정도 많다. 장 여사는 “포스코는 국민의 기업이다. 더 이상 외풍에 시달리게 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