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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인사 220917

by 올곧이 2022. 9. 17.

9월17일 토요일

 

어제 가을초화 심기로 오랫만에 육체노동을 해서 그랬는지 늦잠을 자고 말았네요.

산꼭대기까지 가스가 차 올랐지만 하늘은 흰구름과 파란하늘이 가을임을 느끼게 합니다.

오늘은 울산 중구의 가을축제 중 가장 큰 마두희 줄당기기 축제가 있고 참가 하기로 되어 있어서 아침이 분주합니다.

 

마두희 축제의 역사는 3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데 그 때는 행정구역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정말 시골이었는데 초등학교(60년대) 말쯤 공업도시로 지정됨에 따라 울산이 급 팽창되었지요!

큰 공장을 따라 유입된 인구가 지금은 120만 정도로 늘어 남에 따라 광역시가 되었으니 옛일은 그야말로 옛일이 되었네요.

 

인터넷 선생 Naver는 마두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대동놀이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거나 아예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마두희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서 『학성지(』(1749), 『여지도서(輿』 경상도보유(遺)편 속의 『울산부읍지(』(1557∼1765), 『경상도읍지(』 속의 『울산부읍지』(1832), 『영남읍지(』 속의 『울산부읍지』(1895), 『학성잡기(』(1902) 등 여러 읍지에 지속적으로 소개되었다. 이 가운데 『학성지』 풍속조에 실린 마두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唐)의 발하희(戲)와 같은 종류이다. 매년 단오(午)에 병영과 부(府)의 거주민들에게 칡으로 꼰 줄을 많이 만들게 한다. 그날에 이르러 종루 앞길에 모이도록 하여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도록 명령하면, 같은 편 사람들이 각자 꼰 줄을 합하여 줄을 만들고 줄머리는 빗장의 걸쇠 모양을 만들어서 합환교결(結)하도록 한다. 또 두 사람에게 남자와 여자의 옷을 입도록 하여 남자는 동쪽, 여자는 서쪽 줄머리에 세운다. 양편 사람들이 줄을 메고 서로 어르다가 잽싸게 서로 결합하면, 남자와 여자가 각기 땅에 내려서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무리를 독려하여 서로 끌어당기도록 한다.

동쪽 사람이 흔들어서 서쪽 사람이 지탱하게 되면 서쪽 편이 이기고, 서쪽 사람이 흔들어서 동쪽 사람이 지탱하게 되면 동쪽이 이긴다. 또 양편 사람들에게 씨름을 해서 승부를 가리도록 한 다음에 칡줄을 태화나루의 사공에게 내주어서 배를 매는 말뚝으로 사용하게 한다. 대개 마두(頭)라는 것은 옛날부터 일컫기를, 동대산(山)의 한 줄기가 남쪽 바다 속으로 달리니 그 모양이 말머리와 같은데 원래 서쪽을 돌아보지 않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 흘러감을 싫어하여 줄로 그것을 끌어당김으로써 놀이를 삼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서쪽 편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동쪽 편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 기록을 바탕 삼아 마두희의 면모를 살펴보자. 먼저 대동놀이의 기원에 관한 담론은 대개 그 놀이의 전승을 합리화하는 기제로서, 토착적 해석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풍수지리의 비보압승(勝)과 연관된 기원담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두희의 경우, “동대산의 한 줄기가 남쪽 바다 속으로 달리니 그 모양이 말머리와 같은데, 원래 서쪽을 돌아보지 않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 흘러감을 싫어하여 줄로 그것을 끌어당김으로써 놀이로 삼았다.”라고 한다. 마두희를 풍수지리적 형국론에 근거한 비보 행위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줄은 짚으로 만들지만 기존의 조사 자료와 문헌들을 살펴보면 칡과 삼, 굴피, 새, 대나무 등의 다양한 재료들이 줄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두희의 경우, 19세기 전반까지는 칡줄을 사용했지만 후반부터는 짚으로 줄을 만들었음이 『울산부읍지』(1895) 등 여러 읍지에 나타난다. 이 무렵에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는 줄을 당기는 시기가 단오에서 대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비교적 수도재배(가 일반화한 19세기 중반 이후, 단오를 전후한 시기가 써레질과 모심기, 밭작물의 수확 등으로 줄을 당기기 어려운 농번기가 된 점 그리고 수도재배가 일반화한 결과 줄을 꼬기에 적합한 양질의 짚을 확보할 수 있게 된 점 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줄다리기의 연행 공간은 줄의 규모와 지리적 여건에 따라서 결정되게 마련이다. 내륙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넓은 논밭이나 큰길에서 줄을 당기고, 소규모일 경우에는 골목에서 줄을 당기곤 했다. 마두희의 경우, 연행 공간은 관아의 문루(樓)였던 종루 앞이었는데, 이 길은 울산 고을에서 가장 큰 길이었다.

마두희의 편 구성 방식은 거주 지역에 따라서 동서로 편을 가르는 것이었고, 동서 양편은 각기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였다. 줄의 형태는 암줄과 수줄이 따로 있는 쌍줄이었으며, 각 편의 줄머리에는 각각 남복과 여복을 입은 사람을 태웠다. 18세기까지는 이 정도로 양편의 성별을 표상했지만 20세기 초의 자료를 보면, 동편은 남자 옷을 입고 서편은 여자 옷을 입게 하여(『학성잡기』 풍속) 시간이 흐를수록 양편이 보다 더 분명하게 성(性)을 표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줄머리에 남녀복을 입은 사람을 태우고 서로 어르다가 암수줄을 결합하고 나면, 줄머리에 타고 있던 남녀가 땅으로 내려온 뒤에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이때 줄머리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각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자기편을 독려해 서로 끌어당기도록 함으로써 각 편의 패장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어느 한 쪽이 줄을 많이 끌어와서 상대편이 포기하면 승부가 결정됐다. 줄다리기의 승부가 결정되면 다시 씨름으로 승부를 가리는 과정이 존재했다. 씨름이 일종의 뒤놀이로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마두희는 암줄인 서편의 승리가 곧 풍년을 보장한다는 점세(歲)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대부분의 줄다리기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마두희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세기 전반까지 단오에 줄을 당겼음에도 불구하고 연초에 하게 마련인 점세 행위가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서편의 승리가, 풍수지리적 비보행위로서 마두희의 의미망과 연계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마두희가 1920년대에도 비교적 활발하게 전승되었음이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울산읍내에서 구음(
)정월 15~16 양일간 삭전대회를 개최한다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동서 양편의 편장과 위원들의 극력 활동으로 공전의 큰‘줄’을 만들어 장사진을 버렷는 바 소문이 광포()되여 3,40리 외에서 출전과 구경코저 참집한 자도 다()하야 수만의 군중이 회집하얏는데 양진() 기고() 회중()의 함성은 전시가를 용동(動)케 하엿는데 초일()은 동편이 득성()한 후일 서편이 승첩(捷)하엿다 하며 각종 여흥과 농악으로 파진락을 진(秦)하얏다더라.()
- 조선일보, 1926년 3월 4일자 기사


과가티에서는,하기로 하야西하는이라는데으로부터하야便하리라더라.()
- 동아일보, 1929년 2월 23일자 기사

이들 기사를 통해 마두희가 이틀에 걸쳐서 삼판양승제로 열렸으며, 삼사십 리나 떨어진 지역에서 줄을 당기거나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올 정도로 성대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으로 부터 하야”라는 대목에서 1929년 전까지는 야간에 마두희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고, “동편이 한 후일 서편이 하엿다 하며 각종 여흥과 농악으로 파진락을하얏다더라.”라는 대목에서 줄다리기가 끝난 뒤 농악을 바탕으로 한 뒤풀이 판이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마두희의 전승력은 약화되어, 고을 단위의 줄은 광복될 때까지 두 번 더 당기는 데 그쳤다. 광복 이후인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다시 고을 단위의 줄을 당겼지만 사회적 혼란과 6·25전쟁 등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 뒤 1980년대에 이르러 울산을 상징하는 전통놀이로서 마두희에 대한 관심이 커져, 재현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마두희는 2013년부터 울산광역시 중구에서 해마다 열리는 마두희축제의 중심적 연행으로 자리 잡고 새로운 전승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두희의 지역성은 연행 시기가 19세기 전반까지 단오였다가 그 뒤 대보름으로 바뀐 점, 줄의 재료가 칡에서 짚으로 변한 점, 가장한 남녀를 줄 위에 올려 태워 줄을 어른 뒤 이들이 놀이 진행 과정에서 패장 노릇을 하게 한 점, 씨름을 뒤놀이로 배치한 점, 놀이의 결과에 따른 점세의 배경으로 풍수지리적 비보신앙이 자리 잡은 점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와 같은 면모는 한국 줄다리기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다양성을 파악하는 데 긴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울산마두희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놀이)

 

오늘의 마두희는 또 어떤 면모가 변화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게 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현역일 때는 교통체증이 있어서 짜증만 내었던 "마두희 축제"가 이제 나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살다보니 이런 여유를 갖게 되는군요.
일단 참여해 보고 색다른 점이 있으면 안부에 추가해 놓겠습니다.

시간 되시면 같이 참여하기를 고대하면서 주말 잘 보내시기를...화이팅!

 

태화동에서...

태화동은 1차 부전승에 2차 우정동에 패배

p.s  줄당기기 1차전은 중앙로 동아약국앞에서, 본선은 태화강 둔치에서 종합 행사후 시계탑 4거리에서 시행되었고

씨름은 없었으며 사전행사로 댄스경연대회가 있었는지 시상식을 하였음.

최종 마두희 줄당기기는 서편이 3전2승으로 승리 함.

 

 

https://youtu.be/JiOBLo3WI1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