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속도로 밀려오는 감원 태풍 … 금융·건설·자동차 이어 전 산업계로 서서히 조여올 것으로 보였던 ‘J(Jobless)의 공포’가 예상보다 빠르게 산업현장을 엄습하고 있다. 한계 중소기업·비정규직에서 시작된 고용 쇼크가 전 산업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감원을 발표하는 기업, 회사가 부도나 전 직원이 짐을 싸는 곳이 늘고 있다. 문제는 실직 대란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출근 안 하는 아빠가 얼마나 늘지 예측하기 어렵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의 끔찍했던 ‘퇴출의 추억’이 2008년 대한민국의 겨울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1. 김민종(36·가명)씨가 직장을 잃은 것은 지난 9월이다. 유명 중저가 신사복 제조업체인 T사에서 전국 매장관리를 담당하던 그였다. 고교 졸업 후, 얼마 안 돼 들어간 직장이다.
그는 10년 넘도록 회사의 성장을 지켜봤다. 잘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진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였다고 한다. 재고가 쌓이고,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사장이 돈을 빌리러 다닌다는 소문도 돌았다. 결국 지난 8월 말 1차 부도가 났다. 겨우 막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가 난 다음날, 경영진은 전 직원에게 일괄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사직서를 내고도 김씨는 한 달 정도 회사에 출근했다. 창고에 쌓인 재고를 처리하고, 백화점·할인점 등에 입점해 있는 매장 정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회사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충성이었다.
그는 “부도나기 전 3개월치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요즘 김씨는 다시 직장을 알아보고 있지만 힘든 상황이다. 그는 “예전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회사도 얼마 전 도산했다”며 “의류 시장이 완전히 죽어버렸는데, 어디를 갈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 살짜리 아들과 세 살 된 딸을 둔 그는 “집에 있으면 이웃들 눈치가 보여 일찍 아무 데나 나가거나, 아예 문 밖을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2. 무역·유통업체 B사 직원 250여 명은 현재 무급 휴직 상태다. 회사 관계자는 “기한도 없이 해고장만 기다리는 신세”라고 했다. 지난해 강남 심장부에 10층 규모의 사옥을 완공할 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호텔, 쇼핑몰, 유통, 가구 제조사업 등을 통해 승승장구 하던 B사는 지난해 말부터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올 들어 적자를 면치 못했다.
공들여 만든 사옥은 단 1년 만에 매물로 내놨다. 현금 확보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회사는 현재 호텔을 제외한 비핵심 사업군을 정리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호텔 역시 안전하지 않다. 회사 측은 호텔 직원 150명 중 3분의 2 이상을 아웃소싱할 계획이다. 살아남은 직원은 고작 50여 명 안팎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100명은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아웃소싱 업체에서 근무하거나, 살생부 명단에 오를 처지가 됐다.
#3. 국내 대표적 벤처업체인 H사 직원들은 최근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희망퇴직을 실시한다는 발표였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올 초 한 차례 소규모 인력 구조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감원 규모였다. 경영진이 “100명 정도 희망퇴직을 받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H사의 정원은 240명이다. 절반 가까운 감원 계획에 이 회사 중간 간부는 “너무 황당해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라”고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이런 불황에 100명씩 내치면 어쩌라는 것인지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희망퇴직 조건도 수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회사 측이 제시한 희망퇴직 조건은 한 달치 월급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현재 사옥과 수도권에 있는 연수원 건물까지 매물로 내놓은 상태다.
H사가 관련 업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곳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업계가 받아들이는 충격도 큰 모양이다. 경쟁사인 T사 홍보팀 직원은 “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비록 경쟁사지만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만큼 갑갑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4. A건설은 지금 ‘바람 앞 촛불’ 신세다. 지난해 말 300억원을 넘나들던 현금 유동성은 11월 현재 마이너스 7000여억원으로 추락했다. 아파트 분양률은 바닥이다. 금고는 텅 비었는데, 돈을 채워 넣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급기야 분양가를 대폭 인하한 이른바 ‘땡처리’까지 하고 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다. 돈은 말랐는데, 대출이자·회사 운영비 등 쓸 곳은 많다. A건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2006년 2월 지급 보증한 1000억원에 이르는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건이다.
전체의 11%에 해당하는 직원이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여기엔 40대 임원 5명, 50대 임원 19명이 포함돼 있다. 모두 남성이다. 한 가정의 아빠들이 고구마 줄기 엮이듯 줄줄이 ‘해고 칼날’을 맞은 것이다.
여의도 금융권이 감원 한파 진원지
내년 하반기면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지만, 이번 위기가 2~3년은 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진 미풍 정도지만, 실직 태풍으로 번질 가능성도 크다. 신규 채용은 고사하고, 감원 작업에 들어가는 기업이 하나 둘 늘면서 1996년 명예퇴직, 1998년 정리해고 때와 같은 대량 실직 사태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노조가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 노동자도 있지만 그건 그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다. 당장 올해 어찌어찌 지나간다 해도 내년에 승진이 되지 않는다면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보는 임원들의 입장이 특히 그렇다. 이 상태로는 회사가 어렵다고 보는 직원이 많아졌다.”
한 석유화학 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1000% 정도 성과급이 나왔는데, 올해는 보너스는 없고, 임금은 동결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같은 회사의 다른 과장급 관계자는 “현재 30% 정도 가동을 줄인 상태인데, 회사 내에서 벌써 감원 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 경기와 직결된 분야인 광고대행사의 경우 업계 선두업체인 P사, O사 등 실적이 급감한 곳을 중심으로 이미 감원이 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모 금융사의 경우는 해외법인 직원 중 현지 채용인력을 우선 감원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직장인들이 느끼는 ‘퇴출 스트레스’도 심각한 상태다. 취업 포털인 인크루트와 리서치사인 엠브레인이 최근 직장인 1648명을 대상으로 ‘감원 불안감’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48.8%가 ‘감원 불안감이 커졌다’고 답했다.
또 ‘현재 재직 중인 회사가 감원을 하고 있거나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답한 비율은 42.7%였다. 이에 대해 아웃플레이스먼트(퇴직자 이직 관리) 업체인 DBM 코리아의 김용진 이사는 “외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기업들도 인력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고 있다”며 “내부적으로 검토는 하고 있는데 움직임을 미루는 기업이 많아 연말이나 내년 상반기께 더욱 심해질 것 같다”고 밝혔다.
김석희 삼이실업 회장은 “지금은 동굴에 찬바람이 들어왔을 뿐, 동굴 밖 세상이 더욱 춥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며 “감원 등 구조조정 시기를 놓치거나 ‘이쯤 하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구조조정을 하면 공멸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