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4일 월요일
얼마 전부터 늦잠을 자는 버릇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직장이 있고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항상 갖고 있듯이 나도 직장생활을 수십년간을 했더니 이제 그 강박관념이 사그라질 때도 되었건만 그게 습관으로 굳어진 것 같다. 직장인들이나 사업을 하는 즉,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강박관념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그게 없으면 온전히 직장생활을 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삶을 지속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고 이념에 따른 구분도 필요치 않거니와 자유인이 아닌 이상 모두가 해당될 것이다. 다만 어린 유아들과 보호를 받는 노인들은 예외가 되겠지만. ㅎㅎ
오늘도 나는 습관대로 6시에 눈을 떴지만 다시 잠을 청하려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은 이뤄지지 않았다. 분명 눈은 따가운데 잠이 오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일어나서 신문을 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하고 그냥 일어났다. 당분간은 늦잠을 자기 위한 노력으로 시도만 해보다가 안되면 그냥 일어나는 방법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잠을 자는 것도 별 생각없이 지냈지만 패턴을 보면 이미 몸에 밴 습관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자정을 넘겨야 잠이 올 뿐 그 전에는 별의 별 방법을 동원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물론 몸에 병이 났을 경우는 예외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런 습관이 좋은 것만은 분명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면역이 떨어지는 것도 부족한 잠으로 인하여 그렇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억지로 잔다고 몸에 좋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도 있던데 어느 의사가 진짜인지 모르겠다. 다만 내 개인적으로는 잠이 부족할 때는 피로가 빨리 오는 것 같았으니 일찍 잠을 청하던지 아니면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자는 생각엔 변함없다.ㅋㅋ
어쩔 수 없이 일어났으니 할 일은 해야겠는데 하는 일이라고는 물고기 밥주고, 화초 점검하고, 신문을 보는 것 뿐이다. 오늘도 루틴하게 순서별로 점검하고 마지막 할일인 신문을 펼쳤다. 신문이라고 해봐야 신문같지도 않는 내용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신문을 보는 이유는 뉴스를 보는 것이 주 목적인데 요즘은 뉴스라고 해 봐야 맨날 시끄러운 정치가 다 삼켜버리고 나머지인 컬럼이나 가십거리만 보는 편이다.
오늘도 이런 저런 재미없는 뉴스를 제끼고 나니 볼 것은 없는데 우리말 바루기에 시선이 꽂힌다.
내용은 사람의 죽음에 대한 단어들인데 한번 쯤은 들어 본 말들이지만 이렇게나 죽음에 대한 표현이 다양했는지는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 보다 한꺼번에 망라를 하니 많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원문을 링크한다.
[우리말 바루기] ‘운명’을 달리하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죽음 앞에선 누구나 엄숙하다. 죽은 사람이 누구든 죽음에 관해선 간접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일상의 말들이 아니어서 어려워 보인다. 불교계에선 승려가 죽었을 때 ‘입적(入寂)’이라 한다. ‘고요한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 ‘번뇌나 고뇌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개신교에선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란 표현을 쓴다. 가톨릭에선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이란 의미로 ‘선종(善終)’이라 한다. 천도교에선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에서 ‘환원(還元)’이라 부른다. 종교들이 추구하는 바가 담겼다. 언론 매체의 보도들에서 때때로 접한다.
언론 매체의 부음 기사에서는 ‘사망’ 외에 ‘별세(別世)’ ‘타계(他界)’ ‘서거(死去)’ 같은 말들이 흔히 보인다. 이 가운데 ‘사망’을 빼면 다 죽음을 높인다. 뜻도 쉽지 않다. ‘별세’의 사전적 의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이다. ‘타계’는 “인간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이다. ‘서거’는 “죽어서 세상을 떠남”이란 말이지만, 대통령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만 쓴다. 언론 매체는 마음대로 이 말들에 서열을 정해 놓았다. 사망, 별세, 타계, 서거 순으로 높아진다.
일상에서도 죽음은 높이거나 에둘러진다. ‘숨지다’ ‘돌아가시다’ ‘작고(作故)하다(고인이 되다)’ ‘영면(永眠)하다(영원히 잠든다)’라고 한다. ‘운명(殞命)하다’도 ‘목숨이 끊어지다’라는 말이다. 그러니 ‘운명을 달리하다’는 어색하다. ‘달리하다’는 ‘유명(幽明)’과 어울린다. “그는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유명’은 저승과 이승을 가리킨다. 』
일단 죽음이라는 단어조차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죽음에 대한 표현은 이렇게나 많이 있는지? 하긴 죽음이라 부르기 싫어서 이런 단어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마는...
요즘 신세대들은 줄임말을 만들어 내어 어휘가 더 늘어나는 바람에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곤란을 겪는다는 소리도 들리던데 죽음의 단어 만큼이라도 좀 줄어 들었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게 안되면 계속 사는 수 밖에...오늘도 즐겁게 ! ㅋㅋ
https://www.tistory.com/event/write-challenge-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