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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뉴스

자본의 승리? 인생의 비극?

by 올곧이 2008. 7. 21.

“파업 다시는 안할 것 같아요. 너무 힘들어요”…장기 파업자들의 여름나기

기사입력 2008-07-20 16:51 |최종수정2008-07-20 17:10 기사원문보기


[쿠키 사회] “파업같은 거 다시는 안할 거 같아요. 너무 힘들어요”

지난 9일 서울 면목3동 녹색병원 3201호실. 윤종희씨는 둘째 딸 태해밀(9)양과 함께 침대에 앉아있다. 전날 저녁 해밀양은 자전거 체인에 발이 물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해 뒤꿈치 살점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엄마의 파업장에 오는 길이었다.

해밀양은 발에 기브스를 했어도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은 모양이다. 물 달라, 우유 달라, 투정을 부려본다. 오랜 단식으로 핏기조차 없는 종희씨 얼굴에도 웃음이 비친다. 컨테이너에서 볼 때와 달리 눈빛도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비로소 그녀가 엄마인 걸 알겠다.

점거 55일, 파업 1000일, 단식 40일

종희씨는 그동안 독하게 싸웠다. 55일간 공장을 점거했다. 공장점거는 한국 노동계에서 근래 10여년간 없었던 일이었다. 또 35m 높이의 구로역 CCTV 철탑 고공농성도 자원했다. 종희씨는 그 철탑 위에서 14일을 보내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그리고 이틀만에 퇴원, 전원 단식에 참여해 31일을 굶었다.

정치권의 중재로 재개된 노사교섭에 참석하기 위해 종희씨는 단식을 중단했다. 혈당이 크게 떨어진 탓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복 차림으로 협상장에 나간다. 농성장에 남아 단식을 계속하는 동료들 생각에 종희씨는 피가 마르는 느낌이다. 단식이 40일을 넘어서면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다.

종희씨가 그동안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거나 법정에 선 것은 수십 차례에 이른다. 업무방해, 폭력 등의 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다. 가정살림은 파탄 지경. 전기와 가스가 자주 끊기고, 연체된 공과금 납부서들이 수북하다. 무엇보다 한창 크는 두 딸과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게 힘들다.

종희씨는 기륭전자 생산라인에서 포장 일을 했다. 월급은 64만원. 한 달에 잔업 100시간을 채워야 90여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마저 3개월도 못 했다. 퇴근길에 회사는 문자메시지를 통해 해고를 통보했다. 사유는 잡담.

한 달 평균 20명을 해고하고 또 그만큼 새로 채용하는 회사였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파견 노동자들의 가치는 라인의 부속품만도 못 했다. 종희씨는 “억울하고, 창피했다. 그리고 내 인생이 비참했다”고 말했다. 이튿날 종희씨는 다시 회사로 나갔다. 회사 정문 앞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게 달라졌다

경은씨는 2003년 6월에 집 근처 일산 까르푸점에 취직했다. 친정엄마를 모시고 아홉 살 난 딸 하나를 키우는 주부로서 생활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객만족센터에 배치됐고 3년간 비정규직으로 근무했다. 까르푸는 곧 홈에버로 바뀌었고, 홈에버는 최근 홈플러스에 넘어갔다.

“첫 달에 월급을 타보니 70만원이 조금 넘더라구요. 놀랬어요. 이렇게 오래 서서 일하는데 이렇게밖에 못 받는구나.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의류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스물일곱 살 때쯤 연봉 2600만원을 받았어요. 지금은 나이가 마흔인데 1000만원을 받아요.”

1년에 1000만원을 버는 경은씨에게는 1억100만원짜리 손해배상소송이 걸려있다. 월급통장이 가압류당했고, 퇴직금도 가압류를 당했다. 2007년 6월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참가한 댓가다. 경은씨는 “110만원이라면 어떻게 갚아보겠지만 1억100만원을 제가 어떻게 갚겠느냐?”며 “우리가 이길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랜드는 파업 지도부와 참가자들을 상대로 총 250억원의 손해배상을 걸어놓고 있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경은씨로서는 생애 첫 파업이었다.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근무년수 2년이 안 된 동료들이 해고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파업에 참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경은씨는 “저랑 아주 친했던 동생도 해고당했다”며 “해고되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비정규직인 우리 처지가 너무 억울해서, 그래서 시작한 파업이었다”고 말했다.

경은씨는 파업에 참가한 후 경찰 방패에 찍히기도 하고 물대포를 맞기도 하고 연행되기도 했다. 집회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것도 일상이 됐다. 천막에서 밤을 보내는 것도 부지기수. 1년만에 아주 딴 사람이 된 것 같다.

경은씨는 “회사에 복귀하게 되면 파업 같은 거 다시는 안 할 거 같다”고 말했다. “너무 힘들어요. 남들이 아무리 나서더라도 저는 조용히 매장 안에서 일만 할 거예요.”

“일을 하고 싶어요”

유미씨는 나이도 어린데 무릎이 안 좋다. 맨바닥에 오래 앉아있는 파업 생활로 무릎에 염증이 생긴 것이다.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게 고통스러워 인상을 찡그린다. 의자에 앉아야 좀 편하다. 침도 맞고 물리치료를 받기도 한다. 천성적으로 명랑한 유미씨도 요즘엔 자꾸 우울해지는 기분을 어쩔 수 없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올 때가 있어요. 혼자 있을 때 특히 그래요. 복귀한 사람들을 보면 자유로워 보이고 당당해 보이고 부럽고 그래요. 학교 친구들도 하나둘 시집 가고 회사에서 자리잡고. 그런데 나는 여기서 뭐 하나? 그런 생각이 자꾸 들죠.”

2006년 2월 25일 저녁 9시30분 부산을 출발해 서울로 올라오는 100번 열차. 그 열차가 유미씨의 마지막 열차였다. 늦은 밤 천막농성장을 지키는 유미씨는 자신이 탔던 마지막 열차를 기억해내곤 씨익 웃었다.

“정말 제 일이었어요. 근무는 불규칙했지만 너무 즐거웠어요. 전 원래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거든요. 종착역에 도착해서 손님들이 ‘아가씨, 수고했어’ 한 마디 해주면 뿌듯하고 행복하고 막 그랬어요.”

KTX 승무원 유니폼을 입은 유미씨의 청춘은 환했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 해 150만원쯤하던 월급은 다음 해 120여만원으로 줄었다. 1년 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약속은 휴짓조각이 됐다. 소속은 홍익회에서 ㈜관광레저로, 다시 코레일투어서비스로 해마다 바뀌었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국책사업에 이용된 후 버려지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됐다. 노조가 결성됐고 파업이 시작됐다.

유미씨는 ‘여성투사’는 못 된다. 파업을 하는 동안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나갈까? 말까? 이제라도 여기를 나가야 어디 취직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더 나이가 들면 정말 갈 곳이 없지 않을까? 취업사이트를 검색하기도 하고, 이력서를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유미씨는 그런 고민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파업하기 싫어요. 정말 일을 하고 싶어요.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 어울리고 싶어요.” 탐사기획팀=국민일보 쿠키뉴스 최현수 팀장 김남중 우성규 이도경 기자, 사진부=이병주 기자 tams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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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만 하는 이유?
돈, 명예가 없는 사람은 부품일지라도 아니 부품만큼도 못해도 참아야 한다.
왜 그럴까? 왜 그래야만 할까?
생존! 그것 때문이다.
생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언정 생존없이 이어지지 않는 관계. 그 관계의 단절.
1촌,2촌,3촌,4촌 . . . .촌수가 없는 부부와 이웃사촌과의 단절.
생각할 수도 없는 인생의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더럽고 아니꼽고 참을 수 없는 일에도 굴복해야만 한다?
인생의 비애를 동시에 느끼면서...
죽음이다. 살아있으되 죽어있는 인생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