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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래된 날

by 올곧이 2021. 5. 5.

5월5일 수요일

어젯 밤 내려 붓는 것 같았던 비는 언제 멈췄는지 모르지만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강 건너 남산 풍경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선명한 것을 보니 미세먼지도 싹 거둬간 것 같다.

 

오늘은 어린이 날!

어린이들이 즐거워야 할 날인데 어른보다 더 자란 노인이 즐거운 날인 것 같다.

어린이로 돌아 갈 재주가 없으니 기억으로 나마 돌려 보자면 어린이 때에는 솔직히 어린이 날이 있는지도 몰랐으니 즐기고 말고가 존재할 수는 없었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이 날은 순전히 자식들에게 희생(?)해야 하는 그런 날이었던 것 같았다. 

 

세상은 공평하다고 했는가? ㅎㅎ
자식들이 장성하다보니 이제사 자유가 생겼다. 더구나 하나는 제 짝을 만나 둥지를 떠났으니 돌보지 않아도 되고...

이제사 온전히 휴일을 즐기나 생각이 드는데 한편으로는 매일이 휴일이고 자유로운 날이다 보니 특별히 어린이 날을 즐긴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옛날 일이지만 생각지도 않은 기쁨이 올 때 동네 어르신들께서 하신 말씀이 새쌈 떠오른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암튼 오늘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늘상 입어서 편하기도 하겠지만 펀펀한 개량한복 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빨래줄에 걸린 등산복을 걷어 입고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챙기고, 땀을 딲을 커다란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넣고, 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물통을 들고 다른 손에는 수제품 지팡이를 들고...

기껏 1키로 남짓 걸어서 혁시도시 호반아파트를 지나면 입화산 초입이 나오고 거기서 백여미터 워밍업 코스를 지나면 태화저수지 맞은 편으로 본격적인 등산로로 이어지는데 ...

 

등산로 오솔길로 접어들자 마자 코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어제 늦은 밤까지도 비가 쏟아진 오솔길이 오늘 아침 뜨거운 해볕으로 달아오르는 냄새다.

거기다가 오솔길도 비 때문에 그랬겠지만 주먹만한 돌과 손톱만큼 작은 돌이 나눠져 있는 것을 보니 마치 어릴적 밥을 달라며 어머니 곁에서 투정을 부리며 지켜 본 밭솥 풍경 같다.

 

그 때는 배고픈 시절이라 밥을 기다리는 시간은 삶과 죽음의 문턱에 선 것 같이 심각했다.

나는 귀한 아들이라서 허용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밥이 나오는 광경을 누나들 보다 먼저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밥솥이 화가난 듯 김을 뿜으며 구수한 밥냄새를 쏟아 낸다. 솥뚜껑 아래로 밥물이 눈물같이 삐져 나오면 그 때부터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줄이면서 경건한 자세로 기도하듯 밥솥을 지켜 보셨다. 
그리고, 밥솥에서 흘러나온 하얀 밥물이 종이 쪼그라들 듯 마르고도 한참이 흘러서야 주걱을 들고 솥뚜껑을 여시면 온통 보리밥만 보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쌀밥이 생겨서 보리밥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장면이 ....

비록 아버지의 밥만 쌀밥이었다는 것이 지금에야 이해가 올듯 말듯이지만 그래도 그 때가 좋았었는데...

식구는 많아도 한솥의 밥을 먹고, 한방에서 찌지고 뽂고 울고 불고하던 그 때가 갑자기 그립다.

 

오늘은 어린이를 위한 날이건만 어린이가 아닌 나에게는 오래된 날을 생각한 날로 기억될 것 같다.

향긋한 아카시아 향기도 좋지만 그 밥냄새를 따라 잡으려면 막걸리 밖에 없을 것 같아 걸음이 바빠졌다.

이심전심 마누라와의 교감이 이뤄진다면 금상첨화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