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미/여행

토종 매화를 찾아서

by 올곧이 2008. 4. 3.

古梅花, 차마 감추지 못한 수백년 세월의 향기
‘토종 매화’를 찾아서…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화엄사 ‘흑매’(위 사진)와 선암사 ‘선암매’.

고불총림이라 일컬어지는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는 350년 된 ‘고불매(古佛梅)’가 있다. ‘고불’이란 불교에서 ‘인간의 본래 면목, 그 자리’를 뜻한다. 지난 주말 담장을 슬쩍 넘긴 매화 가지에 화려한 꽃이 달리기 시작했다. 고불매는 우화루 곁에 서있는데, 우화(雨花)란 ‘꽃잎이 비처럼 떨어진다’는 뜻이니 절묘하다.
고매화(古梅花)를 아십니까. 묵향 짙은 수묵화에 등장하는 기품 있는 옛 매화. 함부로 살찌지도 않고, 번성하지도 않으면서,

늙어서는 구불구불 오래된 가지 끝에서 향기를 품어 운치 있게 꽃을 피우는 우리 토종 매화 말입니다.

곳곳에 매실 농장이 들어서면서 매화는 흔하디 흔한 꽃이 됐습니다. 하지만 매실 농장에 심어진 수십만그루의 매화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

가지마다 다닥다닥 꽃이 달리도록 개량한 것입니다. 꽃을 보는 ‘매화나무’라기보다는 열매를 기다리는 ‘매실나무’인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대단위로 심어놓은 섬진강변의 매화들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화려했지만, 옛 그림 속의 그것과는 어째 좀 다르다 싶었습니다.


기품 있게 피어나는 토종 매화는 어디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작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고요한 마음일 때에야 비로소 느껴진다는 토종 매화의 향기는 과연 어디서 맡아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토종 매화를 찾아나선 길입니다. 늙었으되 향이 짙고, 소박하되 정갈한 그런 토종 매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오래되고 운치 있다고 손꼽히는 토종 매화는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만으로 오랜 내력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전남 순천 선암사의 400년 넘은 10여그루 늙은 매화는 절집의 이름을 따서 ‘선암매’로 불립니다. 둥치에는 초록 이끼가 가득 끼었지만, 절집의 정신을 닮아서인지 유독 꽃이 깨끗합니다. 칠전선원 앞의 620살 먹은 백매는 꽃가지를 원통전의 기와담 안쪽으로 슬쩍 넘겨놓고 은은한 매향을 뿜어냅니다.

경남 산청의 매화는 나무를 심은 세도가의 당호나 벼슬을 따 이름을 붙였더군요. 600여년 전에 원정공이 심었다고 해서 ‘원정매’이고, 정당문학 벼슬에 오른 이가 심었다고 해서 ‘정당매’입니다. 여기다가 조선 초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남명 조식이 심었다는 ‘남명매’까지 합치면 ‘산청 삼매(三梅)’가 완성됩니다.

전남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는 하도 붉게 피어나서 검은색이 돈다고 ‘흑매’란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해질 무렵 화엄사 각황전에서 그 꽃의 낭자한 붉은빛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썩’하고 베어버릴 듯한 붉은 매화의 고혹적인 자태는 한동안 잊어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흔히 ‘고불총림’으로 불리는 백양사의 홍매화는 ‘고불매’라고 합니다. 꽃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우화루(雨花樓) 곁의 이 매화는 유독 향기가 짙어 한 그루만으로 온 절집이 매향으로 가득찼습니다.

올해는 토종 매화의 개화가 좀 늦었습니다. 섬진강변 매실밭의 매화가 다 지고 봄기운이 가득찬 뒤에야, 선암사의 선암매와 화엄사의 흑매가 활짝 피어났습니다. 산청의 ‘삼매’는 이미 꽃잎을 분분히 날리며 지고 있지만, 백양사의 ‘고불매’는 이제 막 시작이랍니다.

수백년의 세월을 건너온 이름난 토종 매화들을 돌아보면 싱싱하게 물오른 젊고 풋풋한 매화의 화려함보다, 늙고 뒤틀린 가지에서 힘들게 피워 올린 환한 매화 한 송이가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찌 매화뿐이겠습니까.

순천·구례·산청·장성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