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8일 수요일
햇살이 내려앉은 구장은 천연잔디를 깔아 놓은 듯이 깔끔하다.
평소에 보던 인조잔디는 색이 바래서 허여멀건 한데다가 탄력을 위해 깔아 놓은 고무펠럿 때문에 거무칙칙하게 보였었는데, 오늘은 햇살이 너무 고와서 그런지 잔디색도 초록으로 살아났고 밤새 바람이 불었는지 낙엽하나 없이 깨끗해서 운동장을 사용하는 마니아들도 기분이 좋을 듯 싶다. 감정이 조금 무디다는 나에게도 좋게 보였으니까...ㅎㅎ
이른 아침, 간식을 내어주며 '오늘은 추우니 옷을 많이 끼어 입으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얼마나 추우냐'고 물으니 '영하 2도'라고 했는데 아홉시가 지나가는 지금 기온은 영도라고 나온다. 여남은 마니아들은 모자, 마스크도 모자라 장갑을 끼고 눈만 내 놓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완전 무장을 하였지만 장갑이 부실한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장거리듯 달리는 사람도 있다.
관리실 뒤에서 날아 온 까치가 휭하니 날아와서 운동장에 앉았는데 잠깐 사이에 또 한마리가 먼저 온 까치 옆으로 앉아서 소리없는 몸짓으로 싸인을 보내더니 앞쪽 숲으로 날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까 궁금할 사이도 없이 왼쪽 눈 가장자리로 한 무리의 노란색 새들이 쏟아지듯 운동장에 내려 앉는 모습이 힐것(언뜻) 보여서 시선을 그 곳으로 돌려보니 이슬에 젖은 참나무 낙엽들이다. 관리실 건물 뒤 참나무의 낙엽이 떨어져서 스탠드 지붕위에 있다가 지나가는 바람에 의해서 떨어지는 모양이다. 뱅글뱅글 돌면서 떨어지는 낙엽들이 찬란한 햇살을 받아서 반짝반짝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앞쪽 숲에도 마른 나뭇닢들이 아직 나무에 메달려 있는 것이 제법 보인다.
저 나뭇닢들도 이제나 저제나 떨어질 것은 분명하지만 나무가 그들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아니면, 그들이 나무를 잡고 떨어지기가 싫어서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양쪽 다 애처로운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헤어짐은 늘 그랬으니까!
어릴 때 생각이 난다.
엄마가 장엘 나가시거나 품앗이를 하기 위해 남의 집에 일을 나가실 때, 나는 엄마와 떨어지는 것 자체가 싫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른이 안계시니 조금 무섭다거나 그런 생각도 들었겠지만 그건 아닌 것이 아버지와 떨어질 때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엄마 보다도 힘도 세고 나를 더 보호해 줄 능력이 있었으니 무섭다거나 불안했다면 엄마 보다는 아버지가 더 믿음을 주셨을 테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좀 다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저 세상에서 '이 놈 봐라!' 하지는 않으실런지? ㅋㅋ)
오늘 아침, 일터로 올라오는 잠깐 동안에 들은 라디오 DJ의 멘트가 머릿 속에 남았다. "한 해도 다 갔다"는...
새삼스럽게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본다. 오늘은 12월18일!
12월 달력 중간쯤에 보이는 날이지만 이미 12월의 반을 넘어 섰으니 말 그대로 이제는 올 해도 며칠 남지 않았단 것이 실감 난다. 그동안 나는 뭘 하고 살았는지 돌아 봐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그리고, 어떤 것들과 헤어져야 할지도 생각해 볼 때다.
그리고, 우리 나이는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한다는 나이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도 남았으니 멀리 있는 일들도 당기는 묘수를 생각해야 한다.
그 중 첫째가 딸래미가 반려자를 만나는 일인데, 다행히 요즘은 남자친구를 사귄다고 하니 전망이 밝다. 그 다음이 혼자 남을 아내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놔야 마음이 안정될 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이 모두가 따지고 보면 다 헤어지는 연습 같아서
눈 앞에서 떨어지는 낙엽들이 더 밟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은 진리이건만...
라지에타 위에 얹어 놓았던 실장갑이 제법 따스하다.
찬 바람으로 정신을 가라 앉히고, 열정으로 손과 발을 놀리다 보면 아직 남은 시간들은 많다.
이 남은 시간 만큼 이라도 더 보람차면 남은 근심거리도 줄어 들것 같아서 장갑을 끼고 일을 찾아 나서 본다.
모두가 따스한 날이 되기를 바라면서...
※ 회자정리 거자필반 : '만난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지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 온다'는 뜻의 사자성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