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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인사 220830

by 올곧이 2022. 8. 30.

8월30일 화요일

 

날씨도 날씨지만 오늘은 신문을 읽은게 체했나 봅니다.

 

〈삶의 향기〉라는 컬럼 머릿 글에

"아들이나 딸보다 꼭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중증 장애를 가진 자녀의 부모들입니다.

모든 일을 보호자 없이는 해결할 수 없으니 자신이 없는 상태의 장애 자녀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에 빨려들고 말았네요.

 

내가 돌 볼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그 마음이야 백번 이해를 하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내가 보호하는그 사람이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들은 다 그렇게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가 제목을 다시 봤더니  "나는 장애에 감사합니다"랍니다.

생각에 찬물을 맞은 듯 하고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겨 관심끝까지 따라 가보고 싶었네요.

 

그래서 호출된 사람의 주변을 검색해 본 덕분에 답답하고 힘이 빠지는 후유증이 생기네요.

우리가 사는 삶이 이런 것인가?

조물주는 왜 공평한 삶의 출발선에 서지 못하게 하는가?  싶기도 하고...

분명 좋은 내용이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만 저 구석쪽의 컴컴한 그림만 보는 것인지도...?

기사원문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97993

 

자동차엔 바퀴마다 달린게 브레이큰데 관심이란 것에는 왜 그 흔한 브레이크 하나도 없는 것인지?

기어코 구상솟대문학상 수상자 설미희(1965년생·뇌병변 장애) 시인의 시 전문도 찾아보게 되었네요.

 

《친밀한 타인  / 설미희 (57세)  》

눈을 떴다
온 우주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몸만 둥둥 떠 있다
유일하게 감각이 살아 있는
이 잔인한 귀도 눈을 뜬다

지금은
남의 손이 아니면
소변조차도 뽑아낼 수 없는 몸뚱아리

알람 소리에
감정 없는 기계적인 메마른 손길이
아랫도리에 관을 꽂는다

바우처 카드 720시간
늙은 여자가
친절하게 바코드를 찍는다

연명을 위해
얼마의 돈이 필요해서
소변 줄을 꽂아 주고 있을까

집 안 가득
소변 줄을 타고
아직 살아 있다는
존재의 냄새가 난다.

장애자도 장애를 돌보는 간병인도 서로가 필요하지 않는 그렇다고 불필요 해서도 안되는 관계.

친밀하면서도 타인인 아니 타인이어야 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할 때도 있는 삶이 우리들의 삶?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아니 혼자서는 죽을 수도 없는 일이 있기에...

 

신이 계시다면 오늘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에게 행복한 조건을 만들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