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교육비·생활비에 치여… 돈 되는거면 도전
노인 단순직에만 문호… 월 50만원 벌기도 벅차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지난 7일 경기도 한 고속도로 통행요금소. 직원 김미경(가명·40)씨의 입과 손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김씨는 하루 8시간씩 이곳에 앉아 평균 3000여 명의 운전자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통행료를 받고 있다. 도로에 깔린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에 한 시간만 지나도 목이 칼칼해지지만, 늘 웃음을 잃어선 안 된다.
결혼 후 한번도 '가정'을 떠나본 적 없는 '전업주부'인 김씨는 지난 5월 이곳에 취업했다.
16년째 직장생활을 해온 김씨 남편의 월급은 지난해와 같이 350만원. 김씨는 매달 아파트 대출금(50만원)과 자동차(쏘나타) 할부금(50만원), 남편과 본인 보험료(40만원), 아들 학원비(50만원)를 제하고 남는 160만원 정도로 생활을 해왔다. 공과금·휴대폰요금·교통비로 40만원이 나갔다. 100만원 안에서 먹을 것과 생필품을 사고 나서 20만원 정도를 겨우겨우 남겨 부모님 용돈으로 드렸다.
경기도의 한 고속도로 통행요금소에서 일하고 있는 김미경(가명·40)씨. 결혼 후 줄곧 가정살림만 했던 김씨는 최근 고물가 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지난 5월 취업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
그러나 올 들어 아이스크림 같은 자녀 간식부터 밀가루·채소·과일·고기 등 식품과 생필품값, 휘발유값 등 모든 물가가 뛰면서, '삶의 질'은 점점 낮아졌다. 쇼핑을 줄이고, 문화센터 수강을 끊고, 외식을 줄여도 소용이 없었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었다는 김씨는 "결국 맞벌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씨가 하루 8시간씩 도로 위에서 일하며 버는 돈은 한 달 130만원이다.
◆취업에 내몰리는 전업주부들
고(高)물가와 경기침체로 실질소득이 줄면서, 살림과 육아만 해오던 주부들을 취업 전선으로 몰고 있다. 아르바이트 구직·구인사이트 '알바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이 사이트에 새로 이력서를 등록한 30대 이상 여성은 3만20명으로, 지난 2007년 같은 기간 1만7549명보다 2배 늘었다.
6년 차 전업주부 신모(여·37·서울 노원구)씨는 지난 7월 동네 빵집에서 제빵사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신씨가 일을 하면 아이들 놀이방 보내는 비용이 그만큼 늘어나지만, 몇만원이라도 더 벌기 위해 뛰쳐나왔다.
남편 월급은 예나 지금이나 200만원. 지난해 아파트 전세금 5500만원 중 500만원이 모자라 카드 빚을 졌는데, 올해 전세금이 500만원 더 올랐다. 신씨는 "고물가로 생활비까지 늘어나 살면 살수록 빚만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 단순 육체노동
고물가 때문에 막상 일자리를 찾아 나오긴 했지만, 주부들은 "일하고 싶어도, 경험이 없고 나이도 많은 아줌마를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실제 주부들 취업은 '할인마트 판매직' '공장 노무직' '식당 서빙' '가사도우미' 등 단순 육체노동에 집중돼 있었다. 일부 주부들은 상대적으로 수당이 많은 '노래방 도우미'나 '대리운전'에 뛰어들기도 한다.
주부 송모(여·47·경기 안양)씨는 지난 5월 아픈 몸을 이끌고 화장품 회사 판매원으로 취업했다. 만성신장질환을 앓고 있어 평생 집에만 있었지만, 건설 경기가 죽고 자재 값이 오르면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남편 수입이 거의 제로(0)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송씨는 "요즘이 IMF 위기 때보다 힘든 시기"라고 했다.
지난 8일 오전 서울 연신내역 지하철 입구에서 박희일(가명·75)씨가 무가지를 정리하고 있다. 박씨는 오후엔 신용카드 배달도 하지만 월 총 50만원을 벌기가 힘들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
정혜자(여·39·인천 논현동)씨는 전기기술자인 남편의 일거리가 점점 줄면서, 지난 3월부터 동네 초등학교 급식소에서 시간당 5000원을 받고 3시간 동안 배급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딸(12)과 아들(9)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피해, 옆 학교에 취업을 했다.
정씨는 "돈 때문에 '사교육'도 마음껏 시키지 못한다"며 "가난은 절대 대물림시키고 싶지 않은데, 결국 대물림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일터로 내몰리는 노인들
최근의 고물가는 자신의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노인들을 더욱 절박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8일 오전 5시 50분,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6번 출구에서 무가지 배포 일을 하는 박희일(가명·75) 할아버지는 근무시간보다 40분 먼저 나와 진열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다른 경쟁지 배포원들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박 할아버지가 하루 배포하는 무가지는 1000부다.
"요즘은 경기가 어려우니깐 무가지 집어다가 폐지로 파는 사람들 경쟁이 치열해요. 있는 사람이야 똑같겠지만, 우리처럼 없는 사람에게는 요즘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어졌어."
월수(月收) 20만원인 지하철 도우미나 34만원인 동(洞) 취로사업으로는 생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고령으로 무임승차가 가능한 지하철 택배나 신용카드 배달도 해봤지만 한 달에 잘해야 25만여 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한 달에 30만원을 받는 무가지 배포는 지난달부터 시작했다. 오전에 무가지 배포를 하고, 오후에 신용카드 배달도 하지만 한 달에 50만원 벌기가 어렵다.
박 할아버지 부부가 살아가려면 월세 25만원, 전기료·수도료·가스비·건강보험료 등 공과금과 식비 등 아무리 적게 잡아도 60만원은 들어간다. 자녀들이 조금씩 보내주는 돈이 있어 간신히 꾸려가는 셈이다.
보건복지가족부에 따르면 2007년 12월 기준, 전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154만9000여 명 가운데 65세 이상 수급자는 4분의 1인 38만6000여 명이다. 하지만 박 할아버지는 자녀가 부양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노인들의 일자리 역시 수입이 적은 단순 노무직에 집중돼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60세 이상 취업자는 261만8000여 명. 이 가운데 4분의 1에 해당하는 66만5000여 명이 단순 노무 종사자인 것으로 조사됐다. 농업·임업·어업 종사자가 90만9000여 명으로 가장 많았고, 고위직이나 전문직·사무종사자는 23만4000여 명에 불과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더욱 암울한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