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고장

태화동 지명 유래

by 올곧이 2022. 8. 1.

● 강순내 : 유골(현 유곡)에서 태화강으로 흐르는 내[川]이며 옛날 수패골못이 큰물에 터져서 새각단에 살던 강순이라 하던 모녀가 물에 떠내려가서 죽었으므로 그 내를 강순내라 부른다.

● 광대 캐띠이 : 신기(新基) 마을의 서남쪽 일대를 광대(廣大) 캐띠이(콧등 사투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 가면의 콧등과 같은 지형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 길촌 : 영조 41년(1765)의 기록에 길리[陸里]로 나타나는 마을이다. 육(陸)의 훈(訓)이 길[路]이므로 차훈(借訓)하여 길리로 읽는다. 길촌은 장등산의 뜻을 따서 길[永, 長]의 뜻을 가진 마을이나 육(陸)을 차자하였다. 순조 10년(1810)에는 길리를 길촌이라 고쳐쓰게 되었으며 길(吉)도 역시 길[永, 長]의 음차에 지나지 않는다.

● 난곡 : 난곡은 본시 범서면 운곡동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 상부면으로 이속하여 태화리에 합하였다. 헌종 14년(1848)에 세워 송시열, 김창집, 김제겸의 3현을 향사하던 난곡서원(蘭谷書院)이 있었으나 고종때 없어졌다. 난곡이라 함은 골안[谷內]을 뒤집어 부른 이름이다. 즉, 골안 - 골란 - 란곡으로 변한 것인데 안[內]과 란(蘭)이 서로 통전하는 용례는 아래와 같은 남해군의 난포(蘭浦)에서도 볼 수 있다.

● 내오산 : 오산대밭[鰲山竹林]의 서쪽에 있는 낮은 언덕같은 산이다. 삼산(三山)을 오산이라 한 대칭으로 이 산은 내오산이라 부른다. 역시 거북이같이 생겼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의병장이었던 박 홍춘에 남산십이봉(南山十二峯)과 멍정에서 삼동까지의 30리에 달하는 태화강(太和江) 연어방전( 魚防箭), 오산죽림 백여경, 멍정전결 수십두락을 하사 하였다 하는데 내오산도 마찬가지였다 한다. 여기에 그의 손자 박취문이 만회정을 지은 경승지었으나 정자는 없어지고 봄, 가을, 여름없이 여기에서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 녹사리 : 녹(錄) 사래가 변하여 녹사리라 한다. 평동의 북쪽에 있는 밭인데 묘지기나 마름[舍音]의 보수로 부쳐 먹는 밭이다.

● 대상들 : 원안들의 서쪽들을 대상들이라고 부른다.

● 독적골 : 다운목장에서 남동으로 뻗은 골자기를 독적골이라 한다. 이 독적골을 두고 다운동쪽에서는 도계골이라 하며 또 도적들이 숨어 살았다하여 도적골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같이 이어진 골짜기를 태화나 유곡에서는 독적골이라 부른다. 생각하건데 도자지를 반조하였던 독점골에서 유래된 것이라 보아진다. 점은 옹기점이나 사기점, 쇠부리점 따위의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못을 정조 10년판 읍지는 유골제라 이름하여 길이 460자 넓이 242자라 하였으며 하말들과 원안들, 대상들에 강개한다.

● 돌빼기 : 다운목장(茶雲牧場)으로 들어가는 도로 어귀의 남쪽 일대에 있는 들을 돌빼기라 하는데 그 뜻을 알수 없다.

● 뚝뚝말리 : 우유처리장 남쪽의 들을 뚝뚝말리라고 부른다

● 멀개 : 멀개라는 지명은 세종때와 예종 때의 기록에 나타난다. 멀개[遠浦]는 그 뜻대로 읽으면 멀개가 되어 지금의 멍정[末亭]과는 음이 비슷하고, 그 위치를 고을 서쪽이라 하였으니 멍정에 비슷하다. 마유석이 남으로 마루개 머루개-멀개로 변전하고 마루개는 다시 말개 - 말정으로 변한 것이 오늘의 멍정이라 생각된다.

● 멍정 : 정조때에는 말정과 상말, 하말의 세 마을로 갈라졌다가 고종 31년에 말정의 단일마을이 되었다. 멍정이라 함은 말응정(末應亭)이라 하던 정자의 이름을 줄어서 멍정이된 것이라 한다. 본시 범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에 부내면으로 들어왔다.

● 못안 : 태화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옛 못터였다. 이 못의 물로 옥교동까지 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못터의 안쪽에 있으므로 못안이라 부른다.

● 무지골 : 못안의 북쪽을 무지골이라 한다. 숙종 34년(1708)에는 무지동리라 하여 3개동의 주거가 있었던 마을이었다. 수(水)는 그 훈이 물이니 무만을 취하고 락(落)의 훈(訓)은 디이니 디와 지는 호전(互轉)하여 지가 된다. 옛말 것거디, 업더디, 흐터디, 믈어디,마지기 등이 디, 지의 예이다. 그런데 디 또는 지는 야(野)내지 촌(村)의 뜻을 가졌다.

● 반탕골 : 반탕골은 동강병원의 서편 마을이다. 고종 31년(1894) 이래 반곡이라 하던 독립된 동이었는데 1914년에 태화리에 합하였다. 이 때에 마을 이름도 지금의 반곡으로 고쳐쓰게 되었다. 반탕골의 유래는 골짜기의 생긴 모양이 마치 반티이(함지)모양 같아서 생겼다. 대체로 주변의 지세로 보아 태화사의 금당이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딸린 누각같은 것은 로얄호텔이 있는 곳에 지어 풍류를 즐기는 것이 좋으나 절의 금당은 뒤가 가리워진 자리를 택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며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도 반탕골에서 출토되었다.

● 부도골 : 관음사가 있는 곳을 부다골이라 한다. 이는 부도가 있었던 골이었으므로 속칭 부디골이라 하였다. 지금의 동부아파트 뒷편이라 추정된다.

● 부도골산 : 관음사가 있는 곳을 부도골이라 하는 한편, 이 부근의 산명도 부도골산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는 부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태화산 아래서 동부아파트로 연결된 골(谷)로 추정된다.

● 불선골 : 절태골의 안쪽에 있는 골인데 여기에 향촉을 밝혀놓고 공을 들이던 곳이었으므로 불선골이라 한다. '선'은 '켜다'의 방언이다.

● 서당 만디이 : 절태골의 북쪽에 있는 산의 이름인데 옛날 여기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서당만디이라 한다. 만디이는 말랑(꼭대기)이다. 

● 새각단 : 유골(유곡)의 동쪽에 새로된 마을이다. 각단(角丹)은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 새에만리 : 제일중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을 새에만리라 한다. 새에는 사이의 방언, 아마 멍정과 난곡(蘭谷)의 사이라는 것으로 보이며 만리는 말랑(꼭대기)을 뜻하는 것이다.

● 새터 : 반탕골의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흔히 새터만디이라 부르며 이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 섯갓비알 : 절태골의 서쪽에 있는 산을 섯갓비알이라 하는데 서(西)갓비알인 것 같다. 갓은 산지(山地), 비알은 경사진 땅(斜地)을 비알(삐알로 발음)이라 한다.

● 수패골 : 유골과 새각단의 사이에 있는 골이다. 숲[林]에 난 골이란 것이며 여기에는 수패골 못이 있다.

● 영장골 : 멍정에서 북으로 들어오면 화약고가 있던 서쪽 골인데 독적골에 이어지는 곳이다. 옛날 이곳이 채봉(가장) 터였으므로 영장골이라 한다.

● 예수 바우골 : 절터골에서 동북으로 뻗은 골짜기이며 여우가 바위위에 자주 나타나므로 그렇게 부른다 한다. 동학(東學)을 창도하였던 최제우가 1854년에 이곳에 와서 수도를 하다가 이듬해인 을묘년에 어떤 선사로부터 천서(天書)를 받고 크게 깨친 곳이다. 그 천서를 을묘천서(乙卯天書)라 하며 여우바위골[狐岩谷]은 동학의 성지(聖地)이다.

● 오산대밭 : 내오산 아래에 있는 대밭이다. 일정 때 큰물이 져서 이 일대가 다 백사장으로 되어 있었을 때 일인 오까다[岡田]가 이를 헐값으로 매수하여 대를 심었다. 이 대밭은 두루미들의 서식지인데 지금은 태화강류의 변형으로 두루미들의 서식지(남쪽)는 남쪽에 있다.

● 용금소 : 용금소는 황룡연이라 하던 태화강의 일부이다. 당나라에 수학하러 갔던 자장율사가 중국의 태화지에서 용신의 계시를 받고 돌아와서 그 용의 식복을 위하여 태화강에 설정한 것이 황룡연이었다. 황룡이라 함은 황룡을 음상사에 따라 쓴 것인데 이는 신라 황룡사의 호국룡과 관계된다. 이곳을 지금의 용금소라 한다. 금, 짐, 검, 곰의 우리말은 서로 호전됨을 볼 수 있는 것으로써 이는 신을 뜻하는 옛말인데 왕의 고훈 이사금이나 상감에도 쓰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금소의 금은 신이 깃드는 즉 용신이 깃드는 터[神鄕]라는 뜻을 가졌으며 금은 우리말 금의 음차자(字)이다. 용금소는 태화교의 바로 서편 강을 말한다. 지금의 태화루 아래가 그 곳으로 추정된다.

● 원안들 : 멍정 앞의 관정(管井)이 묻어져 있는 들을 원안들이라 하나 그 유래는 알수 없다.

● 유곡고분유지 : 절태골을 중심하여 독적골의 어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분이 있었으나 개간할 때 모두 없어졌다. 토기를 비롯하여 귀고리[環(환)], 활촉, 도(刀)등의 출토도 있었다 한다. 이중 칼은 그 길이가 6, 70cm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유곡동 : 숙종 34년(1708)에는 무지동리[水落洞里]라 하던 단일 마을이었는데 영조 41년(1765)에는 길리(陸里)가 길촌리(吉村里)로 되었으며 고종 31년(1894)에는 유곡(有谷), 평동(平洞), 길촌(吉村)으로 갈라져 있었던 상부면에 속한 땅이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위 3개동에 운곡동(雲谷洞)의 일부를 합하여 유곡리(裕谷里)라 하였다.

● 유골 :  정조 10년(1786)의 기록에는 유골(有骨)이라 하던 마을이다. 이것이 고종 31년(1894)에는 유골[有谷]로 부르다가다시 1914년에는 유곡(裕谷)으로 변하였다. 골(骨)은 옛 고구려(高句麗) 땅이었던 지명에 붙게 되는 것을 많이 볼수 있는데 이는 골[谷]과 마찬가지이다. 고구려때는 고을[邑]을 골[忽] 또는 골(骨)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유(有)는 얻을 유이니 유골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마을터를 얻을 곳이라는 뜻을 가졌을 것이며 이것이 오늘의 유곡으로 변한 것이다.

● 이씨 열녀각 : 새터와 멍정의 가운데에 있다. 이씨는 이기중의 딸로써 박종규의 아내가 되었다. 혼인하여 몇 년이 되지 않아 지아비가 죽자 그도 뒤를 따라 음독자살 하였다. 조정에서 이 일을 듣자 정려하였다.

● 절토골 : 유골의 서북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터골이라 한다.

● 탑골메기 : 제일중학교의 앞에 있는 들을 탑골매기라 한다. 탑이 있었던 골목이라는 뜻을 가진 것 같다. 옛날 언양 쪽으로 가는 골목길이 여기에 있었다 한다.

● 태화 : 신라 선덕여왕 5년에 고승 자장이 당나라로 건너가서 수도할 때의 일이었다. 산동반도의 태화지가를 지나다가 홀연히 신인을 만나 그의 계시를 받았다. 태화지용이었던 신인으로부터 황룡사의 용은 나의 맏아들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풀어주면 외적이 해하지 못할 것이며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 남쪽에 한 절을 지어 함께 나의 복을 빌면 나도 또한 덕을 갚으리라 하는 계시를 받은 자장은 사포에 올라와서 머무르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태화지 신인의 복을 빌고 나아가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사찰을 지은 것이 태화사였다. 또 이 절에 딸린 태화루도 서게 되니 이는 태화사와 태화루가 있었던 곳이어서 태화라고 한다. 이 때에 강명(江名)도 태화강이라 하여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른다.

● 태화동 : 태화동은 세종조에 원포리라 한 듯하여 정조 때는 상말, 하말, 말정의 세 마을로 갈라져 있었다. 고종 31년(1894)에 이르러는 말정, 태화, 화진, 반곡으로, 1911년에는 태화, 화진, 반곡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태화리라 하였다. 이때 범서면에 속하였던 난곡, 말정을 부내면에서 흡수, 태화리에 합하였다.

● 태화루지 : 옛 로얄호텔 서편에 있었다고 한다. 태화사에 딸린 누각이었는데 신라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 동루와 서루의 두 개가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뒤에 그 현판만 남은 것을 도호부 객관이었던 문루에 걸어 이것을 태화루라 하여 오다가 그 건물은 지금의 신정동에 있는 이휴정이 되었다.

● 평동 : 평동은 고종 31년(1894) 이래 줄곳 평동이라 하여왔다. 무릇 평(平)은 들[野]을 뜻하는 것이다. 평동의 경우는 평지로 된 들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평동의 본마을은 맨 서단의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었으므로 이 지형을 본다면 평지라 할 수 없다. 이 마을에는 천석을 하였던 조씨(曺氏)가 살았으므로 편안한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 하말들 : 태화사 앞들을 하말들이라 한다. 경순왕이 말을 먹인 곳이라 하여 하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하나 하말은 말정의 아랫마을이란 뜻을 가진다. 지금의 희마아파트 앞 하마정(식당) 자리에 하마비가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 함박등 : 예수바우골의 안에 있는 산을 함박등(含朴嶝)이라 한다. 하늘[天]의 원어 한을 의미하는 뜻을 담은 밝은 산이다.

● 화진 : 태화진이 있었던 곳이다. 태화강에는 진도가 세 곳 있었다. 태화진 이외에도 중진, 내황진이 그것이다. 중진은 추진이라 하던 곳이며 각 나루마다 배 한척씩 있었다. 태화진의 건너편은 월진이라 하였다. 고종 31년(1894)이래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1914년에 태화리에 합하였다.

 

p.s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필자도 이해 못할 사투리와 설명이 있어서 다소 생소한 면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이 내력의 출처가 행정기관 사이트에 실린 것이니 그나마 그냥 해석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며

현재의 태화동 행정복지센트에 새로운 내용들이 있으니 비교해 보는 것도 또다른 애향심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