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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명상 호흡을 통한 죽음명상 |
명상나라
2006.06.21 조회:2,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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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가 말했다
발끝에서부터 그대의 몸을 통해 올라오는 불꽃에 초점을 맞추어라
몸이 타서 재가 될지라도 그대는 타지 않을 때까지
붓다는 이 방편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 방편을 행하도록 권유하곤 했다. 누구든지 붓다의 제자로 입문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이것이었다. 붓다는 입문자에게 화장터로 가서 시체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라고 말하곤 했다. 3개월 동안 입문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화장터에 앉아서 불타는 시체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붓다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다만 지켜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타는 시체를 바라보면서 "머지 않아 나의 육체 또한 저렇게 타 없어지리라."하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개월은 긴 시간이다. 그런데 구도자는 밤이나 낮이나 불타는 시체를 지켜보면서 명상해야 했다. 머지 않아 그는 장작더미 위에 불타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방편을 행할 수 없다. 두려움 자체가 그대를 견고한 보호막 안에 가두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죽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또는 표피적인 상상에 머물 뿐 죽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가 두려워하든 두려워하지 않든 간에 죽음은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다. 죽음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삶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우연적이다. 그것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을 살펴보라.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마치 우연히 일어난 사고처럼 말한다. 누군가 죽으면 우리는 그가 너무 빨리 죽었다고 말한다. 마치 그것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우연이 아닌 것은 죽음 밖에 없다. 그외의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다. 죽음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대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대는 이것을 아주 먼 미래의 일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대는 이미 죽어있다. 태어나는 그 순간 그대는 이미 죽었다. 탄생과 더불어 죽음은 확고한 현상이 된다. 죽음의 한 부분인 탄생이 이미 완결되었다. 이제 두번째 부분이 완결되는 일만 남았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미 죽어 있다. 반은 죽어있는 것이다. 일단 태어난 사람은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젠 아무 것도 그것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 방법이 없다. 그대는 이미 죽음 안으로 들어왔다. 탄생과 더불어 반은 죽은 것이다.
죽음은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삶이 하나의 과정이듯이 죽음 또한 과정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나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그대의 두 발, 또는 두 다리와 같다. 삶의 과정이 곧 죽음의 과정이다. 그대는 매 순간 죽어간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삶이 일어나고 숨을 내쉴 때마다 죽음이 일어난다. 이것을 잊지 말라.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일은 숨을 들이쉬는 것이다. 들숨이 첫번째이다. 탄생하는 첫번째 순간에 아기는 숨을 들이쉴 수 없다. 허파에 공기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숨을 들이쉬어야 한다. 숨을 들이쉬는 것, 이것이 아기의 첫번째 행동이다. 반면 죽음이 맞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숨을 내쉬는 일이다. 죽음의 순간에는 숨을 들이쉴 수 없다. 그럴 수 있는가? 죽음을 맞을 때 그대는 숨을 들이쉴 수 없다. 최후의 행동은 들숨이 아니라 날숨이다.
이렇게 최초의 행동은 들숨이고 최후의 행동은 날숨이다. 들숨은 탄생이며 날숨은 죽음이다. 그러나 매순간 그대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한다. 들숨은 삶이고 날숨은 죽음이다.
그대는 관찰한 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번 관찰해보라. 숨을 내쉴 때 그대는 더 평온해진다. 숨을 길게 내뿜어보라. 내면에 어떤 평화가 느껴질 것이다. 반면에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대는 강렬해지고 긴장된다. 들숨의 강렬함 자체가 긴장을 초래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언제나 들숨에 중점을 둔다. 내가 깊이 호흡하라고 말하면 그대는 항상 들숨부터 시작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숨을 내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호흡이 얕아지는 것이다. 그대는 결코 숨을 내뿜지 않는다. 계속해서 들이마실 뿐이다. 숨을 내뿜는 것은 그대의 육체이지 그대가 아니다. 육체는 들숨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숨을 내뿜는 것이다. 삶과 죽음 모두 필요하다.
[ 1 단계 ]
한가지 실험을 해보라. 하루 종일 기억날 때마다 숨을 한껏 내쉬고 결코 들이쉬지 마라. 들이쉬는 숨은 몸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대는 한껏 내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깊은 평화를 느낄 것이다. 죽음은 평화이며 침묵이기 때문이다. 내쉬는데만 집중하면 그대는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계속 숨을 들이쉬면 더 단단한 에고를 느끼고, 숨을 계속 내쉬면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날숨에 더 집중하라. 하루 종일 기억날 때마다 한껏 숨을 내쉬어라. 들이쉬지 마라. 솜을 들이쉬는 것은 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대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이렇게 숨을 내쉬는데 중점을 두면 이 방편을 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대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방편은 별로 두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맛을 보아야만 준비를 할 수 있다. 숨을 한껏 내쉬라. 그러면 죽음을 맛볼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죽음은 아름답다. 죽음처럼 편안하고 고요하며 평온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왜 이토록 죽음을 겁내는 것일까? 사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자체때문이 아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주친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한단 말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려움은 다른데에서 기인한다. 그대는 진정으로 살아온 벅이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대는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하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긴다.
"나는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죽음이 다가오면 어떡하지? 나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사람들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죽음을 환영할 것이다. 아무 두려움도 없다. 그대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이제는 죽음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 자체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
이 방편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그 뿌리깊은 두려움을 자각해야 한다. 그 두려움을 던져버려야만 이 방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쉬는 숨에 더 관심을 기울여라. 이것이 두려움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루 종일 그대는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고 내면의 침묵이 창조될 것이다.
[ 2단계 ]
다른 실험을 하면 이 느낌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하루에 15분씩 숨을 한껏 내쉬어라. 의자나 땅바닥에 앉아 숨을 깊게 내뿜어라. 그리고 숨이 나가는 동안 눈을 감아라. 공기가 나갈 때 그대는 안으로 들어온다. 그 다음에 몸이 숨을 들이쉬도록 허용하라. 그리고 공기가 들어오면 그대는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간다. 그대와 숨은 정반대로 움직인다. 공기가 나가면 그대는 들어오고, 공기가 들어오면 그대는 나간다.
숨을 내쉬면 내면에 공간이 만들어진다. 호흡은 삶이기 때문이다. 숨을 깊게 내뿜으면 그대는 텅빈다. 삶이 나가는 것이다. 잠시동안 그대는 죽어있다. 그 죽음의 침묵을 이용해 안으로 들어가라. 공기가 밖으로 나가면 그대는 눈을 감고 안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쉽게 움직일 수 있다.
3단계의 방편을 행하기 전에 15분 동안 이 실험을 게속하라. 그러면 그대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된다. 준비뿐만이 아니라 죽음을 환영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제 죽음은 깊고 편안한 휴식이다.
[ 3단계 ]
바닥에 누워서 그대의 몸을 시체로 상상하라. 눈을 감고 안으로 들어가라. 발가락에 주의를 집중하고는 그 곳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으며 모든 것을 태우고 있다고 느껴라. 불길이 위로 올라오면서 그대의 몸이 사라지고 있다. 발끝에서 시작하여 위로 움직여라.
왜 발끝에서 시작하는가? 그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발끝은 그대의 '나', 그대의 에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에고는 머리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머리에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라. 발가락이야말로 에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이다. 그 곳부터 태우기 시작하라. 발가락이 타고 재만 남는다고 느껴라. 그리고 불길이 위로 올라오면서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고 느껴라. 종아리가 타고 넓적다리가 타서 없어진다. 이런 식으로 몸을 재로 만들어 버려라. 불길이 지나간 자리는 모두 타서 없어진다. 계속 위로 올라와라. 마침내는 머리마저 타서 없어진다. 이제 그대는 언덕 위의 주시자이다. 타서 재가되어 버린 몸이 거기에 있고, 그대는 그것을 지켜본다. 그대는 주시하는 자이다. 이 주시자는 에고가 아니다.
에고가 사라진 무아(無我)의 상태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이 방편은 매우 유용하다. 이 방편 안에는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방편의 내적인 메카니즘은 매우 복잡하다. 첫째, 그대의 기억은 육체의 일부이다. 기억은 물질이다. 그래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은 뇌세포 안에 기록된다. 기억은 물질이고 육체의 일부이다. 뇌세포가 작동하면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뇌세포의 특정부위가 제거되면 특정한 기억 또한 사라질 것이다.
이 방편을 행하고도 기억이 작동하고 있다면 아직 몸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대는 속임수를 쓴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몸이 죽어서 타버렸다는 느낌, 불길이 몸을 완전히 파괴했다는 느낌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면 그대는 아무 기억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 주시의 순간에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중단된다. 사념이 멈추고 주시만이 남는다.
일단 이것을 알게 되면 그대는 계속해서 이런 상태에 머물 수 있다. 이제 그대는 그대자신과 육체를 나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방편은 그대자신과 육체를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대와 육체 사이에 틈을 만들어 내는 것, 잠시동안 몸 밖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이 방편의 목적이다. 이렇게 되면 그대는 몸 안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겠지만 그대는 다시 똑같은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최소한 3개월 이상이 걸릴 것이다. 꾸준하게 행하라.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꾸준히 행하라. 그러면 어느 날엔가 문득 그대의 상상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대와 육체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대는 실제로 육체가 타서 재가 되어버린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때 주시가 가능하다.
이 주시의 순간에 그대는 에고가 거짓 실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대가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에고가 존재했던 것이다. 사념, 또는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거기 에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육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요소일 뿐이다. 그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외곽의 모든 요소들과 그대는 전혀 별개이다. | | | | | |